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
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등 대 (프란치스코)
오늘 복음은 어느 높은 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을 전해준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9,2).
거룩한 변모사건에 앞서 예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고,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라는 대답을 베드로한테서 들으셨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고(8,31),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다(8,34). 마르코는 이런 일들이 있은 지 “엿새 뒤에”(9,2), 곧 일곱째 날 거룩한 변모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충만을 상징하며 창조와 계약에 관련된 숫자이기도 하다. 일례로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일곱째 날 쉬시면서 세상을 거룩하게 하셨다(창세 2,2-3). 특히 이집트 탈출 때에는 ‘높은 산’ 시나이에서 엿새 동안 당신 영광으로 이스라엘을 감싸신 후 일곱째 날 모세를 불러 계약의 법을 주시면서 계약을 완성하셨다(탈출 24,16). 이러한 관점에서 일곱째 날 이루어진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수난과 부활을 통해 이루실 새로운 창조와 새 계약을 미리 체험하게 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을 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9,4).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기 위해 파견될 예언자로 기대된 인물이었고(말라 3,23；마르 9,11), 모세는 지상에 둘도 없는 거룩한 위인으로서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종말론적 영도자의 본보기였다(신명 18,15.18). 이 두 인물은 각각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할 뿐 아니라 구약의 구원 약속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출현은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8,27-28)과 달리 예수께서는 엘리야나 예언자 중 한 분이 아니라 그들이 예고하고 고대했던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께 “초막 셋을 지어 드릴 테니 이 자리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9,5). 초막은 초막절을 떠올리게 하며, 초막절은 가을걷이가 끝난 다음 벌이는 추수감사 축제다. 따라서 베드로의 말은 이제 겨우 첫번째 수난 예고가 선포된 상태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잔치를 벌이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엉겁결에 한 말이라고는 해도 십자가를 건너뛰고 곧바로 영광으로 나아가고 싶어한 베드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9,9).
예수님의 이 당부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변모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겪고 부활하시어 승리와 영광에 싸여 나타나실 당신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자들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영광스런 승리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왕, 초월적인 힘으로 세상을 당신 발 아래 굴복시키는 통치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상태에서 변모사건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다. 그러한 조짐을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첫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을 때(8,31)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 저도 그 고난과 죽음을 겪겠습니다”라고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했다(8,32). 베드로는 예수님을 권능과 힘으로 지배하는 세상의 다른 왕들처럼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8,33).
베드로처럼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예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통해 당신의 사명이 완성될 때까지 이 일을 비밀에 부치라고 명하신다. 같은 이유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제자 또는 많은 사람을 대동하지 않으시고 훗날 당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증언할 사도들 사이에서 주춧돌 역할을 할 세 제자에게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변모사건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준다. 특히 베드로처럼 수난을 거부하면서 영광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수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을 거부한 채 영광만을 열망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8,33)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는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결코 영광스럽게 변화될 수 없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묵상과 기도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주님, 저희가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묵상하며 용기와 희망을 얻어 당신이 맡겨주신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는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저희(그리스도인)가 당신처럼, 당신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에 들게 하소서.
김정훈 신부(전주교구, 전주가톨릭 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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